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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My Story

▶◀ 2010년 12월 20일

 

2010년 12월 20일, 친 할아버지인 고(故) 홍광표 할아버님께서 오후 3시쯤에 향년 90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2주일 전쯤,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아버지가 급히 시골에 내려가셨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위 사진은 지난 추석 때 찍었던 사진입니다.

할아버지는 80세 정도까진 쟁쟁하셨습니다만, 다리가 몹시 안 좋아지셔서 요양병원에 묵게 되셨었습니다.

4남 4녀의 아들 딸을 두셨지만, 장남이 전에 전에 환갑을 넘었으니 모두 자립한 것은 뻔한 사실… 대책은 요양병원.

이곳을 방문하면서 드는 생각은, 정말 병자(病者)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

안 아픈 사람이 없다는 것…

추석 때 찍고 왠지 모르게 외면하던 사진들을 꺼내봤습니다.

다리 외에는 쟁쟁하셨던 할아버지가 매우 답답해 하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아파트 시대에는 보기 힘든 문패…

 

 

사실 원래는 기와집 형태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아래와 같이 추가적으로 개선을 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안의 장지문 정도가 옛 추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왼쪽의 밭은 사실 뒷간이었습니다만, 이제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하니 매꿔버리고 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 곳을 보시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족 모두 아쉬워 했어요….

할아버지 기억 속에는 여전히 화장실로만 남을텐데….

 

 

유일하게 초가집의 형태가 남아있는 곳 사랑방입니다.

할아버지는 평소 이곳에서 생활하셨지만, 이제 이곳도 안 쓰인지 몇 년이 넘었네요.

오른쪽은 원래 소가 있었던 곳이고 저도 소를 많이 봐왔던 기억이 나지만, 없어진디 몇 년 되었습니다.

잘 안보이겠지만 할아버지가 평생 패 놓았던 장작이 많이 남아 있어요.

 

 

매장을 하려고 모였습니다.

저도 4남 중의 맏아들에 속하는 격인지라 할아버지의 관을 옮겼어요.

버스가 있는 곳에서부터 옮겼는데, 관이 정말 무거워서 울뻔했습니다.

관이 무거운 건 어쩔 수 없다 손 쳐도, 날씨가 풀리다 보니 얼어있던 땅에 습기가 차서 질척질척한 게 장난이 아니었어요.

보이진 않겠지만 사진 속의 모든 인물들은 다들 바지 밑단과 신발이 엉망입니다.

사진에는 제 동생 둘도 보이고, 대의 형과 태호 형이 보이네요. 태호 형은 창의 형과 착각해서…. 정말 미안하더라고요. OTL..

4남 4녀 아들 딸이 낳은 손자 손녀들이 좀 많아야지~

 

 

포크레인으로 매장할 곳을 만들고 있던 모습입니다.

이것까지 합해서 장례식 비용이 1,600만원이 들었다더군요.

다행인진 모르겠지만 역시 자손들이 많으니까 각각 200만원 씩 부담하기로 하셨던 것 같아요.

별세 하신지 6시간 만에 친척과 가족 모두가 모여 장례식을 거행한 거 보면….

이러쿵 저러쿵 해도 가족은 가족이고 친척은 친척이다 싶습니다.

 

 

결국 저 파는 곳에 할아버지 관을 놓아드리고,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배 드리고, 그리고 천지? 어쨌든 무슨 붉은 종이 위에 흙을 한 삽씩 친지들이 모두 모여서

상 중 하로 뿌렸습니다. 전 하 중 상으로 뿌려 버렸는데 뭐….

솔직히 울컥하긴 했지만 눈물은 안 흘렸습니다.

사실상 친척들 모두가 몇 주 전부터 위독하다고 한번씩 모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다들 침울하긴 해도 눈물을 흘리시진 않으셨어요.

다만 고모 분들께서는 많이 우셨지요.

아무래도 남자는 안 울고, 여성은 많이 울었던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늙어서 가지면 안 되는 것 세 가지

가난, 질병, 고독

21세기의 많은 노인들이 이것 중 하나 이상을 가지고 많은 고통 속에서 노년을 보냅니다.

돈이 없으면 편한한 노후 생활을 할 수 없고,

질병이 있으면 자유로운 노후 생활을 할 수 없으며,

친구가 없으면 쓸쓸한 노후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는 질병과 고독에 시달리다 가셨고, 할머니도 그렇습니다.

매 추석, 설날 때 느끼지만 홀로 남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을 보면 정말 가슴이 미어집니다.

 

나이 90세에 8명의 아들 딸을 성공적으로 키우셨기에,

할아버지의 삶은 성공했다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와주고,

자신의 죽음을 위해 울어줄 아들 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복 받았다고 전 생각합니다.

다만 정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오후 3시쯤, 별세하실 때 아무도 곁에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눈을 뜨고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손자인 제 마음도 이렇게 미어지건만

할머니와 아들 딸 들은 어떨는지….

 

할아버지는 90 평생을 전라북도 임실군 청웅리에서 사셨습니다.

남은 할머니가 겨울을 쓸쓸하게 보내시게 될 텐데, 그 쪽도 상당히 걱정입니다.

더불어 외가 쪽 할머니 할아버지도 매우 몸도 안 좋으시고….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장례식이란 걸 지켜봐 왔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깨달았습니다.

 

그저..

좋은 곳 가십시오….

좋은 곳 가십시오….

축복 받으소서….